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·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(문단 편집) === 소련의 동태 === [[독소전쟁]]이 끝나 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[[얄타 회담]]에서 [[소련]]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.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소련 몫도 늘어나니 [[태평양]]에서 소련의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. 미국이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. [[독일]]이 항복하여 [[유럽]]에서 전쟁이 끝나 소련은 한숨 돌린 상태였던 반면 일본 본토의 [[일본군]]은 이미 전쟁 수행 능력 태반을 잃어서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. 곧이어 [[소련군]]이 기갑 웨이브를 펼치며 만주, 한반도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고, 안 그래도 태평양 방면으로의 병력 차출로 약화되었던 관동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빠르게 무너져 항복했다. 미국이 두려워한 시나리오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소련이 [[동북아시아|동북아]]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놓는 일이었다. 일제의 항복 이후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점령지로 진주하여 [[한반도]]에서 마주쳐서 이를 갈라먹고 그걸 기점으로 [[냉전]] 상태에 돌입한 것도 '소련보다 빨리 극동에 입성하기 위해 핵을 사용했다'는 견해를 뒷받침한다. 일본이 항복했을 때 소련은 만주의 관동군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[[삼팔선|38선]] 이북의 한반도를 8월 중으로 재빠르게 점령했지만, 당시 미국은 병사 한 명조차 한반도에 없었고 일본 [[오키나와]]에 있었으며 9월 중순에야 [[서울특별시|서울]]에 입성했다. 결과적으로 소련보다 한 발 늦은 것이다.[* 일제의 항복 무렵 미국은 어떻게든 수도 서울을 확보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서울을 포함한 남쪽 지역은 미국이, 북쪽 지역은 소련이 관할하는 것을 소련에 제안했고 39선 이북 시나리오도 고려하던 [[이오시프 스탈린|스탈린]]은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